로맨스 영화의 영원한 고전 '남과 여'
프랑스적으로 우울한 로맨스! 1966년 개봉되어 오늘날까지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속에 로맨스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는 영화. 196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의 복원판이 LA와 뉴욕에서 재개봉된다. ‘남과 여’는 단 3주 만에 완성됐다. 누구도 이 영화가 이후 프랑스 영화의 전설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불과 28세 신인 감독의 작품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줄거리에 대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대신 두 주연 배우의 이미지로 채운 영상미 때문이었다. 여주인공 안느 역의 아누크 에메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숙미와 남자 주인공 역의 장루이 트랭티냥의 깊이 있는 내면이 신비스럽고 로맨틱한 조화를 이루었다. ‘남과 여’는, 스타일은 멜로드라마의 모든 것이라는 걸 입증해 보인 영화였다. 평범하고 밋밋한 듯 보이지만 극적으로 로맨틱한 분위기로 연출했고 안개처럼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이어지는 사랑을 잔잔하고 황홀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남과 여’에는 두 남녀 주인공 외에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주제가 ‘러브 테마’다. 영화 촬영을 다 마치고 난 후, 를르슈 감독은 뭔가 부족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작곡가 프란시스 레이의 달콤한 음악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영화의 주제곡은 영화 못지않게 큰 인기를 얻었다. 레이는 이후 ‘러브스토리’(1970)의 주제가를 작곡, 로맨스 영화 음악의 거장 반열에 오른다. 영화 스크립터 안느(아누크 에메)는 파리에 혼자 살고 있다.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근교 도빌의 기숙학교로 딸을 찾아간다.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홀애비 장루이(장루이 트랭티냥)도 다를 바 없다. 카레이서인 그는 아들과 주말을 보내기 위해 차를 몰고 도빌로 향한다. 안느는 딸과 보내는 행복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막차를 놓치고 만다. 일 때문에 파리로 돌아가야만 하는 안느, 당황해 하는 그녀에게 장루이가 다가간다.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 남과 여는 이렇게 처음 만난다. 남자는 아름다운 안느에게 마음이 끌린다.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지만 안느는 자신이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도착할 무렵에야 얼마 전 스턴트맨으로 일하던 남편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음 주에 함께 도빌로 가자는 장루이의 제안에 안느는 답 대신 전화번호를 적어 준다. 이후 두 사람은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한가로운 파리의 거리를 누비고, 호젓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만 간다. 안느는 장루이의 아내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카레이서 남편을 기다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주를 마친 장루이에게 안느는 “사랑해요”라는 단 한마디의 전보를 보내고 장 루이는 즉시 안느를 향해 달려간다. 2008년, 를르슈 감독은 속편 ‘남과 여, 20년후(Un Homme Et une femme, 20 ans deja)’를 발표한다. 30대였던 두 주인공이 50대의 중년이 되어 다시 재회하는 내용이다. 전편이 영상미와 분위기 위주였다면 속편은 두 배우의 원숙한 연기력에 의존하여 영화를 끌고 나간다. 보사노바풍의 테마 음악이 영화 전편에 흐른다. 안느는 50대 중반의 영화제작자가 되어 있고 장루이는 여전히 카레이서로 일하고 있다. 장 루이의 아들은 결혼했고 안느의 딸은 엄마의 영향을 받아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어느 날 딸이 장루이의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전하면서 두 사람은 20년 만에 재회한다. 안느는 장루이에게 20년 전의 추억을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영화 속 자신의 역할은 안느의 딸이 맡기로 하고 촬영에 들어간다. 이후 영화는 영화 속 영화와 영화 밖 현실을 오가며 진행되지만 안느는 갑자기 영화를 중단해버린다. 중단되었던 그들의 사랑을 의미하는 듯. 2019년 를르슈 감독은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대되어 ‘남과 여’ 3편을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The Best Years of a Life)’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오리지널 발표 후 54년만의 일이다. 같은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노년의 두 배우가 다시 한번 안느와 장루이를 연기하며 이전 두 작품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요양원에 앉아 있는 80대 후반의 장루이. 그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아들조차도 알아보지 못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한때 사랑했던 여인 안느. 그는 안느와 함께 요양원을 탈출한다.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바다를 향해 질주한다. 쫓아오는 경찰에게 총을 쏘아댄다. 꿈에서 깨어난다. 여전히 요양원 마당이다. 아들은 안느를 수소문, 아버지 앞에 데려온다. 그러나 설렘으로 찾아온 안나를 장루이는 알아보지 못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해피엔딩인 줄 알았던 1966년의 원작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과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안느를 장루이는 견디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의 품을 전전하다 결국 안느와 헤어지고 말았다. 장루이는 안느가 누군가와 닮았다면서 말한다. 자신에게도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노라고. 안느는 장루이의 ‘과거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사람의 운명에 얽힌 사랑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자신만을 사랑한다면서 자신을 떠나갔던 남자, 자신만을 사랑한다면서 이 순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 안느는 인제야 깨닫는다. 장루이가 자신을 떠났지만, 아직도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트랭티냥과 에메가 2022년과 2024년에 사망할 때까지 생전에 출연한 마지막 영화였다. 2015년 전도연, 공유 주연의 ‘남과 여’는 눈 덮인 핀란드를 배경으로 한다. 아이들이 다니는 국제학교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고, 8개월 후 서울에서 만나 다시 사랑을 이어가는 스토리! 를르슈 감독의 원작의 제목과 내용을 살짝 차용한 한국판 ‘남과 여’는 윤리와 책임감, 배우자에 대한 죄책감을 뒤로하고 뜨거운 장면 가득한 ‘불륜’ 이야기로 전개된다. 전도연의 우아한 연기가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사랑을 나누는 장루이와 안나. ‘남과 여’라는 제목의 4편의 영화가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로맨스 영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칸영화제 비경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